서재필기념재단, ‘제1회 미주한인 시민권의 날’ 행사 성황리에 개최했다..

주요 참가자들이 단체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서재필기념재단(회장 최정수)은 6월 19일(토) 필라델피아 서쪽 근교 미디아(Media)시에 위치한 서재필기념관에서 ‘제1회 미주한인 시민권의 날(Korean American Citizenship Day)’기념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종섭 뉴욕총영사관 필라델피아사무소장과 앤디 김(Andy Kim) 미연방 하원의원 및 펜실베니아주 상원의원 등 미 정치권 인사들, 그리고 필라델피아, 남부뉴저지 및 델라웨어주 한인회, 재향군인회지회 등 한인단체와 아시안연합에서 12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팀 하 목사가 행사 시작전 기도를 하고 있다.

 6월 19일인 이날은 서재필 박사가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지 131년째가 되는 날이며, 서재필기념재단은 지난해 마무리된 기념관 재단장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날을 역사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국내외 여러 인사들과 함께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다.

마침내 펜실베니아주 하원은 지난 6월 16일에 크리스토퍼 퀸(Christopher Quinn), 스티븐 말라가리(Steven Malagari), 토드 스테판스(Todd Stephens), 브라이언 커틀러(Brian Cutler) 및 패티 김(Patty Kim) 의원 등이 주도한 선언문을 채택하여, 6월 19일을 ‘미주한인 시민권의 날(Korean American Citizenship Day)’로 지정하였다.

미주한인 시민권의 날 지정을 추진한 펜주 하원의원 및 재단 관계자들.

이 밖에도 탐 울프(Tom Wolf) 펜실베니아 주지사, 메리 게이 스캔런(Mary Gay Scanlon) 연방 하원의원, 데이비드 오(David Oh) 필라델피아 시의원과 기념관이 속한 델라웨어 카운티(Delaware County), 어퍼 프라비던스 타운쉽(Upper Providence Township) 및 미디어시(Media City) 등 총 7개 기관에서 기념일을 축하하는 결의안 또는 선언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인의 미국이민 효시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을 타고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날로 하여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서재필 박사는 이보다 약 13년이나 빠른 1890년 6월 19일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하였으므로 실제로는 이날이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정수 재단회장은 인사말에서 “첫 행사는 펜실베니아주 및 지역 행사로 열리지만, 한인 이민사에 중요한 날인 만큼 차츰 전국적인 행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대해 이종섭 소장은 “한인사회에서도 많은 호응이 있기를 바라며, 영사관 차원에서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최정수 재단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종섭 소장이 축하연설을 하고 있다.

앤디 김 연방의원은 “모든 이민자들처럼 50년전에 부모님께서도 꿈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으며, 서재필 박사는 ‘아메리칸 드림’의 선구자이다.”라며 기념일을 축하했다.

▲ 앤디 김 연방의원이 축하연설을 하고 있다.

최근 서재필재단과 함께 지역내에서 COVID 백신 캠페인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는 아트 해이우드(Art Haywood) 및 마리아 콜렛(Maria Collet) 펜주 상원의원도 기념일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계속 아시안과 지역 발전을 위해 재단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했다.

왼쪽부터 마리아 콜렛 펜주 상원의원, 최정수 회장, 아트 헤이우드 펜주 상원의원

이 밖에 데이비드 오(David Oh) 필라델피아 시의원, 밥 맥마혼(Bob McMahon) 미디어시 시장, 이주향 미북동부한인회 회장 등이 차례로 축하 메세지를 전했다.

데이비드 오 시의원(오른쪽)이 축하 메세지를 전한 뒤 최정수 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다.

밥 맥마혼 미디어 시장이(오른쪽)이 축하 메세지를 전한 뒤 최정수 회장에게 결의안을 전달하고 있다.

이주향 회장이 축하연설을 하고 있다.

특히, 미국성경협회(American Bible Society) 소속 패이스 앤 리버티 이니셔티브(Faith and Liberty Initiative)의 알란 크레펜(Alan Creppen) 이사는 기조연설에서 “최초의 코리안 아메리칸인 서재필 박사는 한국의 민주화와 국가건설에 기여하면서 자유와 신앙의 삶을 사셨다”며, “그는 아시안계 미국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개척자였다”고 말했다.

▲ 미국성경협회 알란 크레펜 이사가 기조연설을하고 있다.

미국성경협회(American Bible Society)는 금년 5월 1일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바로 건너편에 수년간 6천만불을 투자하여 패이스 앤 리버티 디스커버리 박물관(Faith and Liberty Discovery Center)을 새로 개관하고, 성경을 중심으로 미국의 자유에 큰 영향을 이룬 위대한 미국인 22명을 선정하여 그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애브라함 링컨, 마르틴 루터킹 등과 함께 서재필 박사도 선정함으로써 방문객들이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니디아 한 6abc 앵커가 감사패를 받은 후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재단은 이날 행사에서 그동안 서재필 기념사업을 함께 해 온 여러 단체에 대한 특별 시상식도 가졌다. 서재필 박사를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미국성경협회, 최근 아시안 혐오범죄에 맞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데이비드 오 시의원과 니디아 한(Nydia Han) 6abc 뉴스 앵커, ‘청소년 전통모듬북 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박선영 단장 등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박선영 단장(오른쪽)과 청소년 전통모듬북 그룹이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또한, 지난 2월 이후 아시아계, 흑인 및 라틴계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COVID 백신접종을 위해 재단과 호흡을 맞추고 있은 펜주 필리핀간호사협회에게도 감사패를 수여했다.

최정수 회장이 펜주 필리핀간호사협회에게도 감사패를 수여하고 있다.

한편, 서재필 박사는 일평생 동안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 그리고 독립국가 건설에 크나 큰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로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서재필 박사.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 외가에서 태어나서 1882년 최연소로 과거급제 했다. 개화사상에 눈을 뜬 서재필은 1884년 12월에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로 끝났고 주역들은 역적이 됐다.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행 배를 타고 1885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만난 독지가인 존 홀렌백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의 해리힐맨 고교를 다녔다.

고교졸업후 워싱턴으로 이동한 서재필은 1889년 컬럼비안대(현 조지워싱턴대)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여 1892년 졸업했다. 인턴을 거쳐 이듬해 한국인 최초로 의사 면허를 얻고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조선정부로부터 사면이 된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서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민주주의와 독립의식 고취에 힘썼다. 독립문 건립과 만민공동회 개최 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수구세력과 일본·러시아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898년 5월 다시 한국을 떠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했다.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열어 한국독립을 호소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서재필은 미국인들을 규합해 전세계 23개 지부에 2만여 회원을 거느린 ‘한국친우회’를 만들었으며, 3년간 전국을 다니면서 미국인 10만여명을 대상으로 300여회의 연설도 하였다.

그는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해 일제의 만행과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으며,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와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훗날 한국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서재필은 두 번에 걸쳐 전쟁에 자진 참여하게 된다.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미국-스페인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미육군군의관으로 입대를 하였다. 1942년에는 미군 징병의무관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사회참여에도 헌신적이었다. 1905년 문방구 사업에 뛰어든 이후 70여명의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크게 성공할 무렵에는 로타리클럽, 프리메이슨 및 미국안보동맹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병리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의사로서 주민건강을 위해 특집 컬럼을 규칙적으로 투고하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해방직후에는 미군정 최고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한미 양국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서재필의 이러한 미국시민으로서의 모범은 미국정부 등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어, 1945년 1월에는 미의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서재필박사 사후인 1975년에는 미디어시에서 서재필기념비 건립을 위해 로즈트리 파크 부지 일부를 무상으로 내어 놓았다. 2008년에는 워싱턴 DC에 한국인 최초로 서재필동상이 세워졌고, 2021년 5월에는 미국독립기념관 건너편 박물관에 서재필이 미국의 위대한 인물 22인으로 선정 전시되었다.

한국정부는 1977년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199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했다.(미주한인 시민권의 날 문의: 215-224-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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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서재필재단>